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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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황, 문학과 의학 사이에서

대담 마종기(시인)

진행/정리 김종태(시인)

김종태 : 오늘은 시인 마종기 선생님을 모시고 웹진 《문장》에서 마련한 ‘작가와 작가’ 대담을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시 쓰는 김종태입니다. 저는 선생님을 오늘 처음 뵙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오랫동안 읽어 와서 그런지 선생님의 모습이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요즘 여러 활동들을 펼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몇 년 전 오랜 세월 동안 근무하신 병원에서 정년퇴직을 하시고 더욱 활기찬 시인 생활을 하고 계신 것 같으신데 선생님의 근황을 말씀해주시지요.

마종기 : 반갑습니다, 김종태 시인! 저는 1966년 6월에 조국을 떠났습니다. 그러고 보니 도미한  지, 햇수로 40년, 정확하게는 39년 5개월 정도가 되었습니다. 2년 반 전에 미국에서 의사 교수로 근무했던 직장에서 은퇴를 했습니다. 한글로 시를 쓰면서, 조국이 아닌 이국에서 살아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해가 지날수록 자괴감이 들었습니다.

제 모교인 연세대 의과대학에서 <문학과 의학>이라는 새로운 강좌의 초빙교수로 와달라고 해서 몇 해 전부터 고국에서 한 해의 절반 정도를 지내고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문학과 의학에 대한 강좌가 많이 있었습니다. 문학이 의학도에게 주는 도움이 많다는 것을 절실히 느껴왔기 때문에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쳐주고 싶었습니다.

김종태 : 요즘은 강의가 중요한 일이 되셨겠네요.

마종기 : 제 후배들이라서 그런지 본과 2학년, 일반대학으로 보면 4학년 학생들에게 선택과목으로 가르치는데, 여러 가지 느낌이 많이 생깁니다. 제가 의과에 다닐 때는 시나 소설을 읽는 경우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래서 늘 외톨이로 다녔는데, 요즘은 많은 학생들이 시를 읽고 소설도 읽어서 깜짝 놀랐습니다. 사회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해서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김종태 : 선생님의 강의를 듣는 의과대학생 중에서 시를 쓰는 제자가 많이 나올 것 같습니다.

마종기 :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예술적인 취미를 갖는 것이 의사 생활을 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 역시 미국에서 의사 생활을 할 수 있었던 힘이 시를 쓰고 문학을 좋아하는 것에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김종태 : 문인이라면 쓰라린 습작 시절이 누구에게나 있을 것 같은데요. 선생님의 습작 시절에 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또한 선생님께서는 4?19세대의 가운데에 계셨는데, 그 세대의 문학적 특징에 대해 말씀해주시지요.

마종기 : 의학을 공부하면서 시를 써왔던 이유에는 남다른 경험이 있었습니다. 생각하지 않던 의과로 대학을 정하고 물리?화학 공부를 하면서 저는 글을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너무 답답하고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대학 생활이 힘들어지면서 다시 시를 쓰기 시작했는데, 의과대학에 다니다 보니 책을 읽거나 시를 쓸 물리적인 시간이 부족했습니다. 시를 많이 못 썼지만 주위에 글 쓰는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많은 자극을 받았습니다.

군의관을 하고 미국에 가게 되었는데, 그때 문학을 집어치우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의사로서 외국에 나가 산다는 것이 힘들어서 시를 쓰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문화적인 충격 때문에 오히려 시로 돌아와서 마음의 안정을 위해 다시 쓰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막혀 있는 공간, 도저히 탈출할 수 없는 미로라는 느낌이 있어서 반사적으로 시를 쓴 것 같습니다. 고국에서 적당한 직업을 가졌으면 시를 쓰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막혀 있는 듯한 정신적인 상태가 시로의 탈출을 시도하게 했습니다.

김종태 : 선생님께서는 의사라는 삶과 시인이라는 삶, 이 두 가지 삶을 동시에 잘 만들어 가셨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나라의 문학사를 살펴보면, 체호프처럼 소설가이면서 의사인 경우와 존 키츠처럼 시인이면서 의사인 경우가 있는데요. 선생님께서는 『문학과 의학』이라는 저서에서 그러한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자연과학인 의학과 인문과학인 문학 두 가지를 병행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에는 어떤 것이 있으셨는지요?

마종기 : 의학은 사람의 생명을 다루는 학문으로 과학적인 분석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1+1=2가 꼭 되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생명이 파괴될 수 있는 자리에 자주 서게 됩니다. 문학의 경우 1+1=2가 되면 오히려 문학이 아닌 것이 되지요. 그런 것이 의학이 가지는 정확성과 상반되는 것입니다. 두 가지의 조화가 사는 데 있어 중요한 문제가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내가 의사로서의 외로움을 크게 겪지 않은 것은 문학의 아름다움에 빠질 수 있는 행운이 있어서였던 것 같습니다.

김종태 : 의사와 시인으로서의 균형 감각이 선생님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은 1959년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셨으니,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시를 쓰신 셈인데요. 영어로 생활하는 유랑자로서 모국어인 한국어로 시를 쓴다는 것이 어떤 존재론적 의미를 주었는지요?

 

 

김수영의 칭찬

 

마종기 : 미국에서 의사 수련을 시작으로 40년을 살았습니다. 살기 위해서,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시를 썼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살아야 한다는 절박한 순간이 되니까 시를 쓰게 되었습니다. 외롭고 힘들 때 모국어 시를 읽고 쓰면서 정신적인 안정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시가 나에게는 어려운 시간을 견디게 하는 위로가 되었습니다.

시를 쓴다는 것이 허영의 소산이나 이름을 위한 욕심이 아닌, 내가 살 수 있는 방편이기 때문에 절실했습니다. 고국에 살지 않으면서 모국어로 시를 써야 하는, 사방이 막힌 상황에서 ‘살려 달라’는 외침 같은 것이 시가 되었습니다. 어려운 조건들이 오히려 나에겐 시를 쓸 수 있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김종태 : 미국에 계신 것이 오히려 역설적이게 시를 더 열심히 쓰시게 만든 것 같습니다. 선생님께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과 함께 조국에 대한 서운함과 사랑을 시로 녹이셨습니다.

어떤 시인에게나 자기가 가장 아끼는 시집과 시가 있을 텐데요. 선생님의 경우는 어떠신지요? 한 편만 육성으로 낭송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종기 : 수백 편의 시를 쓰고 발표했으니, 어느 시집이나 어느 시를 꼬집어 이야기하기가 참 어렵습니다. 굳이 시집 한 권을 들자면 오랫동안 사랑받았던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를 들 수 있습니다. 이 시집에 실린 1958년 무렵의 작품 「그레고리안 성가」라는 시를 낭송해 보겠습니다.

 

그레고리안 성가 2

 

저기 날아가는 나뭇잎에게 물어보아라,

공중에 서 있는 저 바람에게 물어보아라,

저녁의 해변가에는 한 사람도 없었다.

갈매기 몇 마리, 울다가 찾다가 어디 숨고

생각에 잠긴 구름이 살 색깔을 바꾸고

혼자 살던 바다가 부끄러워 얼굴을 붉혔다.

 

해변에 가서 그레고리안 성가를 듣는다.

파이프 오르간의 젖은 고백이 귀를 채운다.

상처를 아물게 하는 차가운 천국의 바다,

밀물결이 또 해안의 살결을 쓰다듬었다.

나도 낮은 파도가 되어 당신에게 다가갔다.

시간이 멈추고 석양이 푸르게 가라앉았다.

입 다문 해안이 잔잔한 꿈을 꾸기 시작했다.

나도 떠도는 내 운명을 원망하지 않기로 했다.

 

김종태 : 바다의 이미지가 중심이 되면서 고독한 비애의 정서가 묻어 있는 작품입니다. 한국 시인의 계보를 나누어본다면 전통서정 계열, 모더니즘 계열, 리얼리즘 계열로 나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선생님의 시를 이러한 문학사적 계보에 넣는다면 전통서정시 계열에 넣어야 하지 않을까 합니다. 이런 선생님의 시세계에 영향을 미친 국내외의 시인은 어떤 분들이신지요?

마종기 : 재미있는 말씀이시네요. 제가 1960년대 초에 문단에 나와 기고만장해서 다닐 적에 저

와 친구들은 스스로를 전통서정 계열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전통서정 계열에는 서정주, 박재삼 이런 분들이 있었는데, 저희는 거기에 들어가지 못하고 제 자신도 그쪽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1963년 의대 졸업하던 해 발표한 시가 「정신과 병동」이라는 시였는데, 김수영 선생님께서 긴 촌평을 쓰셨습니다. 그분의 산문집에도 그런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지금까지 서정시를 쓴 사람들은 이 시를 읽고 깨어나라고 쓰셨습니다. 그 해의 중요한 수확이라고까지 말씀해주셨습니다. 제 시의 전문이 실렸습니다. 초년병 시절이었는데, 많이 고무되었던 사건입니다.

제게 영향을 준 시인은 많습니다. 어느 한 분만을 지적할 수는 없고, 미당 선생님,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선생님을 따랐습니다. 당시에 그 바로 밑 세대들은 그분들에게 반항하면서 외국의 프랑스 상징주의 시들, 말라르메 등과 같은 시들을 따랐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일본 번역을 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바로 그 밑 세대였습니다. 우리는 한글 1세대니까 일본 말은 모르고 영어로 그 시들을 보았는데 많이 달랐습니다. 프랑스, 일본, 한국의 시학이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새로운 기운을 찾는 것, 상당히 점진적인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서정주, 김종삼, 김수영에게 경도되었습니다. 김종삼 선생님은 새로운 서정에 대한 꿈을, 김수영 선생님은 현실참여적인, 문학적으로는 혁명가적인 영향을 주셨습니다.

주위 친구들, 좋은 시를 쓰던 황동규, 정현종, 김영태 이런 시인들과도 영향을 서로 주고받지 않았나 싶습니다.

김종태 : 선생님의 초기 시는 모더니즘적이며 실험적이었던 데 반해, 중후기 시의 세계관은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의 세계, 즉 서정의 세계로 귀결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김수영 선생님 이후 수많은 중진 평론가들과 신예 평론가들이 선생님의 시에 대해 많은 논의를 했는데요. 대표적으로는 김주연 선생님의 ‘동심과 달관의 시’, 김병익 선생님의 ‘투명한 시’, 황동규 선생님의 ‘따뜻함과 아픔의 진혼시’, 박이도 선생님의 ‘명징한 이미지의 시’ 등의 평가가 있는데, 이런 평가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마종기 : 대체로 동의하고 있습니다. 제가 살아온 과정이 내 시의 틀에도 작용했는데 외국에서 오래 살아서 향수 이미지가 확실히 서정적인 것으로 귀결된 것 같습니다. 미술이나 음악에 대한 것을 주제로 한 시들이 저에게는 직접적으로는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가식이 아닐까 의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이면서 수필적으로 쓰는 시로 변하게 되었습니다. 

김종태 : 선생님의 시는 한국 문단의 시류를 좇지 않으면서 진실성, 진정성, 핍진성의 세계를 추구하셨습니다.

마종기 : 감사합니다. 나 자신에게 진실한 시를 쓰고, 그런 내 문학이 다른 사람들에게 작은 위로가 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김종태 : 진실성이라는 말을 많이 하셨는데, 선생님의 시에는 주변의 지인들, 가족에 관한 이야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선생님의 가족사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아버지 마해송

 

마종기 : 의사 수련을 받고 오겠다고 고국을 떠난 지 4개월 만에 아버지가 뇌일혈로 돌아가셨습니다. 임종도 못하고, 장례식에 참석할 돈도 없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고,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외국에서 살았습니다. 1960년대에 고국을 떠난 저에게 신나고 좋은 일은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어머니에게 신세를 지지 않고 의사 수련을 마치고 싶었습니다.

제 동생이 사회부 기자였는데, 정치적인 일에 관련되어 회사도 그만두고 미국에 와서 살 수밖에 없게 되서 제 주위에서 살다가 1994년 총기 사고로 죽었습니다. 그때 가슴이 아팠습니다. 문인들이 한일회담 반대하다가 끌려가는 등 정치적인 사건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문학을 하기에는 이상하게도 좋지 않은 환경에서 살아왔습니다. 좋지 못한 환경이 시를 쓰게 했습니다. 식물이 해를 쫓아가듯이 기형적으로 시를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김종태 : 『이슬의 눈』이라는 시집에서 동생분에 관한 시를 보았습니다. 선생님께서는 얼마 전 『아버지 마해송』이라는 300쪽이 넘는 글을 쓰셨는데요. 아버지 마해송 선생님의 삶과 마종기 선생님의 삶 사이에는 어떤 운명적인 인과관계가 있었는지 말씀해주시지요.

마종기 : 아버지께서는 열한 살 나이에 집안에서 성혼을 시키려 하자 극렬히 반대하시고, 또 퇴학을 당한 후 반항아처럼 지내다가 연애 사건을 만들기도 하셨습니다. 일본에 건너가서 일본의 대표적인 문예지 《문예춘추》의 창간 동인으로 활약하기도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본에서 재산을 다 날리고, 그 이후 돌아가시는 날까지 직장을 안 가지고 가난하게 사셨습니다. 동화만 쓰시면서 사셨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국책회사 사장, 정부 관리 등의 제안을 다 거절하셨는데 고국에 사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것에 반발했습니다.

제가 문과에 소질이 있었는데 진로를 의과로 바꾸게 된 것은, 김현의 말처럼 ‘정신적으로 물질적으로 편안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희 아버지는 ‘세상을 사는 게 뜬구름이라지만 외국에서 사는 것이 더욱 뜬구름이다. 내 나라에서 사는 것이 애국이다’라는 편지를 써주셨습니다. 이런저런 관계들이 저를 아직까지 끌어주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제게는 장성한 아들이 셋인데, 모두 한국 여자와 결혼을 한 것이 자랑스럽고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종태 : 가난하게 사셨던 문인 아버지에게 반항하셨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는데, 지금은 아버지에 대한 자랑스러움을 더욱 많이 갖고 계신 듯합니다.

마종기 : 의과에 간 것으로 섭섭하게 해드린 것이 죄송하게 생각됩니다.

김종태 : 지금 저승에서 보시면, 시인이나 의사 두 가지 다 잘했다고 생각하실 것 같습니다. 자제분 중에는 문학을 하시는 분이 아무도 없는지요?

마종기 : 네, 없습니다. 미국에서는 시가 오래전에 죽었습니다. 1970년대 1980년대까지 직접 살면서 그 나라 그 땅에서 글을 쓰고, 한국의 문인으로 문학적 자각을 하면서 길을 열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엔솔로지나 동인지에 투고도 하면서 1970년대 말에는 교수를 하는 시인과 연락이 되어서 국가에서 나오는 돈을 기다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현대시가 아무 곳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교수들의 시집이 100권, 200권 정도도 팔리지 않습니다. 시의 사정이 아주 어렵습니다. 제가 내린 결론은 오늘의 시가 살려면 우선 시의 내용이 이해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식적으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시인들에 비하면 한국 시인들은 참 행복하다고 생각합니다. 학생들이 제 시를 외우는 것을 보고 놀라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시를 쓰므로 시가 죽지 않도록 해야 하는 사명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를 너무 장난같이, 우스개로, 어렵게 쓰는 것은 피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기자기한 말, 아름다운 말, 섬광같이 따뜻하고 빛나는 시를 써야 한다는 희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해성에 편향된 젊은 시들

 

김종태 : 한국 시의 큰 문제가 난해성에 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동의합니다. 우리나라 여러 시인들을 살펴보면, 문단에서만 유명한 시인이 있는가 하면, 어떤 시인은 대중들에게는 인정을 받지만 문단에서는 전혀 인정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은 문단과 대중 사이에서 공히 알려진 시인으로서 한국 문단과 한국 독자들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고 계신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시인들에게 하시고 싶은 말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종기 : 젊은 시인들의 시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읽고 있습니다. 시의 방향을 상당히 좋게 보아왔습니다. 그 중에 어떤 부분, 해체적인 시를 쓰는 분들의 용기와 열성에 찬성하지만, 한국 시의 장래를 볼 때 그런 시적 편향에 구애를 받지 않았으면 합니다. 저는 한국 시가 앞서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문학 이론만 있는 나라, 현대시의 이론만 있는 나라에는 오히려 좋은 시가 별로 없습니다.

시류적인 것에 너무 연연해하지 않고 한국만이 가질 수 있는 문학적인 자부심을 가지고 우리들이 만들 수 있는 우리의 사조를 만들어야 합니다. 서구 사조에 대해서 재고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종태 : 너무 극단적인 실험성이나 해체성에 대한 걱정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마종기 : 그러한 것들이 시에 대한 사랑을 식게 할 것 같습니다. 서양 시를 자주 접한 것이 이런 생각에 작용을 한 것 같습니다. 미국에서는 시 잡지의 종이가 아주 나쁩니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미국 시는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런 난해성은 무가치합니다.

김종태 : 우리 젊은 시인들이 각성을 좀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 성정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시심으로 세계와 자아의 동일성을 회복해야 한다는 선생님 말씀에 깊이 동의합니다. 앞으로의 계획을 듣고 싶습니다.

마종기 : 내년 중반기에 새 시집을 내려고 합니다. 저는 일 년에 열 편 정도의 시를 발표합니다. 이 기준을 1970년대 초부터 지켜왔습니다. 한 해도 쉬지 않았다는 것에 대해 기특하다고 생각합니다. 5년에 한 권씩 시집이 나왔습니다. 또 다른 한 가지는 대한의학협회와 협력하여 《의학과 문학》이라는 잡지를 만들어서 의학과 문학을 접목시키는 두 가지 일을 할 계획입니다.

김종태 : 앞으로도 계속 좋은 시 더 많이 쓰셔서 저희 후학들을 깨우쳐 주십시오. 오늘 선생님께서 들려주신 자상한 육성의 말씀들이 많은 독자들에게 진한 감동을 안겨줄 것입니다. 선생님의 건강과 건필을 기원하면서 오늘 대담을 마치겠습니다.《문장 웹진/200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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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이 바닥이 아니라는 게 놀랍다"

ㅋㅏ페ㅂㅔ네보다 바닥인 결말이라니
지붕킥은 결말이 있기라도 했어



내 마음이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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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순식간에 연느 버금가는 유대표 짤을 줍고
개별폴더까지 만들었는데

하하하하

분노가 사그러들지가 않아

같은 방송사 수목 드라마도 삐끗이 없진 않았지만 결말을 잘 맺어서
인생드 되고 그러는 거 보니까 다시 화나

절필아 재정해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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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생 휴가에 따라 강원도를 간 김에 속초에서 1박을 하고 왔다. 아침식당은 잠이 덜 깬 상태였어서 사진이 없다. 순두부촌에 가면 대부분 아침식사 가능한 식당들이고 평타치는 것 같다. 내가 아침식사 되는 집으로 찾아놨던 건 터미널 근처에 청국장 보리밥집이였는데 그냥 가는길에 순두부촌이 있어서 먹고 움직였다.


속초하면 설악산. 아빠 고향이 양양인데 매번 자기는 어릴 때 뒷산이 설악산이고 앞마당이 동해바다인 곳에서 자랐다고 자랑하는데 지겹다.
설악산 입장료 있다. 국립공원은 무료인데 절에서 돈 받아먹는다. 그것도 현금만! 카드 안됨.


억울해서? 괘씸해서? 처음 절 쪽으로 가봤다.
역시나 강원도구나 싶게 하늘이 엄청 맑고 푸르러서 가을하늘 같았다. 바람이 불어서 엄청 추웠다. 단풍이 들었을 때나 눈이 왔을 때 여기서 산자락을 감상하면 멋있을 거 같아서 잠시 스님들을 부러워했다.


짬밥이 가장 낮은 스님이 아닐까 추측해봤다. 바람불고 엄청 추운날에 당번에 걸려서 나와서 저렇게 하고 있는 걸꺼라고. 발성에 감탄함. 목소리 좋으셨다.
아빠가 케이블카 탈래 울산바위까지 등산할래 제안 해봤지만 우린 모두 거절했다. 다 귀찮고 그냥 설악산 스팟 찍은거에 만족하는 스타일의 자식들. 둘 다 열정적이지 않아 다행이야.


알못인데 전복이 저렇게 작아서 진짜 자연산일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수산시장 바이브. 가 뭔지도 모르는데 단어 써보고 싶었다.


모두가 양손에 만석과 중앙을 하나씩 들고 갈때 우리는 시장과 북청닭강정을 들고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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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닭강정은 동생픽. 달고 계피맛이 많이 나고 끈적하고 튀김옷이 많다.


북청닭강정은 내픽. 다른 곳들은 만들어져 있는데 북청은 주문을 하면 만들기 시작해서 기다려야 된다. 순살은 10분 뼈있는 건 15분. 세 단계 매운맛 중 중간으로, 순살도 국내산이라 순살로 닭강정반후라이드반으로 주문. 할인적용 해주신다고 하고선 영수증보니 정가결제 되어있어서 웃겼음. 줬다뺐긴 기분. 달거나 매운 강하게 튀는 맛이 없고 깔끔한 맛과 식감. 깻잎이 들어가서 향이 살짝 느껴진다. 튀김옷으로 양 많아보이게 하지 않고 다 살코기 그대로의 닭강정이라 좋었다.

퇴실하고 수영장에서 사진 찍으면서만 30분을 놀았다. 엄마가 다 키우니까 특별한데 안 데려가도 그냥 알아서 노니까 좋다고 했다. 아닙니다 어머님 텅 빈 수영장은 매우 특별합니다. 루시드폴 뮤직비디오도 생각나고 그랬다. 옆에서 촬영하고 있는데 가볼 수 없었던 슬픈 과거에 아직까지 한이 맺혀있다. 점심 휴식시간에 갔더니 촬영팀도 칼같이 점심시간을 지켜 자리를 비우셔서 보지 못했었다. 스태프 처우가 너무 좋은 업체였어..
장소가 다 한 사진인데 어쨌든 내가 찍은 사진으로서 너무 맘에 들었다!!!! 올해의 사진임ㅇㅇ


아이폰이 유난히 푸른색을 잘 잡는 것 같다. 새파란 하늘과 검푸른 바다. 하늘의 색이 비춰서 바다색이 저렇게 보일 뿐 사실 바닷물은 깨끗하지 않았다.


숨은그림찾기 느낌으로 보다보면 울산바위가 보이는 사진. 울산바위가 정말 멋있었다. 산자락에 바위병풍이 있는 풍경에 감탄이 절로 나왔다. 진짜 우리나라 산맥들 멋있음. 저 산맥은 말도 없이 오천년을 살았네를 시작하자 모두 합창해주었다.


초야 삼교리 동치미 막국수 식당.


막국수 식당에서 들깨칼국수 먹는 사람 나야나. 근데 매우 훌륭한 선택이었음. 들깨 칼국수류는 보통 짠맛이 강한데 여기는 간이 세지 않고 맛있었다. 강원도라 그런지 특이하게 황태와 부추도 들어있었는데 부추 좋아.


물막 비막이 따로 없고 알아서 제조해먹는 시스템. 국수 뭉치를 휘휘 풀면 2-3젓가락이면 끝인 곳도 많은데 여기는 국수 양이 넉넉했다. 메밀면도 괜찮은데 사실 기대한건 동치미였는데 국물 자체가 시원한 스타일이 아니고 꽤 달달해서.. 비빔스타일로 자가제조 해먹는게 나았다.


엄마가 역시 강원도라고 어떻게 열무김치에도 고춧가루가 이렇게 안 보이냐고 칭찬? 감탄?​​했다.


차에서 신호가 걸려서 멈췄을 때 보였는데 웃겨서 찍었다. 마약브레드를 drug bread로 직역해서 홍보판을 세워두셨다. 헤로인빵 이런 느낌.. 위험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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