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50년 시인 마종기 + 루시드폴
2010. 06. 04
(사진 제공ㅣ 블로거 강석환) '마종기 시인 시력 50년 기념의 밤' 행사. 이병률 시인(왼쪽)과 토크 타임 중인 마종기 시인의 표정이 밝다
마종기 시인은 50년간 시를 썼다. 40년 넘게 미국에서 살았지만, 시는 모국어인 한국어로 썼다. 한국 말을 잊지 않으려고 공부하면서. 미국에선 방사선과 전문의와 의대 교수로 안락한 삶을 꾸렸지만 그래도 어두운 밤이면 시가 찾아 왔다. 지난 2002년 은퇴한 후엔 1년에 몇 달씩 한국에 머물면서 연세대 의대 초빙교수로 5년간 ‘문학과 의학’ 과목을 가르쳤다.
남들이 보면 부럽기만 한 인생, 하나 슬픔과 역경이 없었다면 그토록 투명한 시를 쓸 수 있었을까.
마종기 시인은 지난 1966년 군의관으로 재직하다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 서명을 한 게 문제가 돼 운명처럼 미국으로 떠났다. 석 달 뒤 아동문학가였던 아버지 마해송이 눈을 감았지만 돈이 없어 한국으로 올 수가 없었다. 늘 영구 귀국을 꿈꿨지만 일흔이 넘긴 지금도 상황은 녹록하지 않다.
올해
마종기 시인은 등단 50년을 맞았다. 지난달에는 후배 문인들이 ‘마종기 시인 시력 50년 기념의 밤’ 행사를 마련해 줬다. 오랜 지기인황동규 ,정현종 시인을 비롯문정희 ,황인숙 ,김혜순 등 후배 시인이 자리를 빛냈다. 뮤지션 루시드폴은 노래를 불렀고,이병률 시인은 짧은 토크를 진행했다. 한국 문단에서 후배들이 직접 나서 열린 이런 행사는 최초여서 부러움과 놀라움을 산 자리였다.
마종기 시인은 최근 자신의 시 가운데 50편을 골라 시작(詩作) 에세이『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비채)와 열 두 번째 시집『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을 출간했다.『당신을 부르며 살았다』‘작가의 말’에
시인은 이렇게 썼다.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어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 편의 시를 써왔다면, 그 인간의 가슴 어느 곳에 몇 개의 상처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내 탓일 뿐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지 않은가.'
지난 26일, ‘교보문고와 함께하는 저자와의 티타임’ 행사가 끝난 후
마종기 시인을 만났다. 그리고 두 해전 그와 서간집『아주 사적인 긴 만남』(마종기 , 루시드폴ㅣ웅진지식하우스)을 발표했던 뮤지션 루시드폴과 전화인터뷰를 통해 두 사람의 인연에 대해 들었다.
#1. [시인 마종기 인터뷰]
(사진 제공ㅣ 비채) '교보문고와 함께하는 마종기 시인과의 티타임' 후 모두 모여 사진 찰칵!
‘저자와의 티타임’에 다양한 연령의 팬들이 다녀갔다. 기분이 어떤가?
참 좋았다. 나에 대해서 잘 아시는 분들이 오셨더라. 질문도 많이 해 주고. 예전에 ‘문학과 의학’ 강의 할 때도 어린 학생들이 내 시 제목도 알고 외우기도 해서 ‘도대체 이상하다’ 그랬는데(웃음). 수능 시험 준비할 때 외워야 된대, 내 시를.
오늘 티타임 때 기억에 남는 질문이 있었나?
다 그렇지만, 답하기 어려운 질문이 있다. 한국에 아주 돌아올 예정은 없느냐는. 확실한 건 아니지만 차츰 영구 귀국이 불가능하지 않을까 쪽으로 기울고 있다. 우선 우리애들이 미국에서 나고 자라서 거기서 터전을 밥 먹고 사는데 따로 떨어져서 살기도 힘들 것 같고. 많이 슬프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매년 한국에 몇 달씩 와서 지내니까.
최근 등단 50년을 정리하는 시작에세이집『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를 냈다. 감회가 새롭겠다.
이번 책은 나한텐 굉장히 큰 일이다. 지난 50년을 정리하는 거니까. 한국을 떠나 산 지가 44,5년 됐는데 몸은 외국에서 살았지만 나 대신에 시는 한국에서 살아 줬으니 얼마나 고마운지. 내가 대학생 때부터 지금까지 쓴 시 중에서 50편 골라서 실은 건데. 그 동안 내가 고국에서 버림 받지 않고 살아온 것 같아 감회가 깊다. 그렇잖아, 내가 문단에 나왔던 1960년대에 나온 시인들, 이젠 다 잊혀져서 어디로 갔는지 모르는데.
시 마다 기억을 끄집어 내, 시를 쓰던 시절의 이야기를 에세이로 풀어내는 작업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다.
어차피 내가 문학적으로 깊이를 추구하지 않으니까 상당히 표피적인 글이 되긴 했다. 깊이가 없다고 누가 욕하면 난 또 미국으로 도망가면 되니까, 뭐.(웃음) 문학적으로 평가를 받기 위해서 책을 낸 게 아니고 내 시가 이 땅에서 산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로 낸 거니까.
나, 정말 잘 살았을까
'마종기 시인과의 티타임' 에 참석하기 위해 안동에서 서울까지 KTX를 타고 온 부녀
대학 교수인 아버지는 수업도 휴강하고 마종기 시인을 만나러 왔다. 참 보기 좋은 아버지와 딸의 모습이었다
외로워서 시를 썼다고 했는데, 그래도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었겠다. 제 3자 입장에선 참 멋진 인생 같은는데.
글쎄.(웃음) 처음 미국에 가서 2, 3년은 미국 의사들 보다 내가 더 뛰어나야겠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덜 자고 열심히 공부했다. 그 후40여 년간 존경 받으면서 편하게 살아 온 것도 같다. 또 한국에선 시를 발표해 왔고 겉으로는 괜찮은 삶이지. 그런데 이제 나이가 70이 넘고 생각을 해 보니까 그렇지 않은 것 같아.
자식들이 우리 문화를 너무 몰라. 할아버지 산소가 어디에 있는 지도 모르고. 미국에서 실용주의 교육을 받아서 그런지 아버지가 시를 쓴다고 해도 시큰둥하고. 번역원에서 내 시를 번역한 영시집이 나와서 전해 줘도 별 반응이 없고. 애들이 변호사고, 의사인데. 자신들의 조국이 한국인 건 알지만 여기 와서 살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 주지 못했으니 생각해 보면 내가 잘 못 산 거 같아.(웃음)
미국에서 의사로서 사는 건 어땠나?
참 좋았다. 미국에 가서 최단 기간에 전문의가 됐고, 대학 교수로서 최고의 교수상도 받고, 한국 사람 최초로 소아방사선과 전문의도 됐고. 겉으로도, 속으로도 내가 의사로서 침체돼 있었거나 절망을 했던 때는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죄책감이나 자책에 대한 표현이 시에서 자주 눈에 띄더라. 고국을 떠나 있는 세월 동안 현실 참여 대신 서정시를 쓴 것에 대해 비판도 받고 했다며?
몇 번 받았지. 그건 뭐 당연한 거다. 고국에서 고생하면서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친구들이 있는데 난 미국에서 살면서 하늘이 푸르고 뭐 그런 소리를 했으니까. 자책감도 좀 들지. 세월이 많이 흘렀어도 그렇다. 시인이 모국어의 세상에서 살지 않는다는 건 힘든 일이다. 공부를 해야 돼. 그래서 한국 책 많이 읽었다. 그래도 일상에서 단련된, 세련된 단어 선택에는 역시 어려움이 있지.
얼마 전에 루시드폴하고 서간집을 냈다. 젊은 독자들도 많이 생겼을 것 같은데.
맞다. 나도 깜짝 놀랐다.(웃음) 얼마 전에 루시드폴 나오는 공연을 보러 갔어.
시를 놓치면 우주의 미아가 될 것 같아
루시드폴하고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된 건가?
몇 년 전에 한 출판사 사람이 와서 그런 얘길 하더라고. 루시드폴이란 가수가 있대. 난 잘 몰랐지. 그 사람이 스위스에서 유학 중인 공학박사고, 뮤지션이기도 하대. 나도 과학을 공부하고 예술을 하고 또 외국에서 살고 있으니까 두 사람이 잘 맞지 않겠냐고. 루시드폴이 내 시를 참 좋아한대. 그 사람이 팬으로서 편지를 보내면 답을 해 줄 수 있느냐고 묻더라고. 그거야 편지를 봐야 알겠다고 말했지.(웃음)
2년 넘게 두 분이 이메일로 교감을 했는데, 처음 이메일을 받았을 때 어땠나? 계속 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던가?
그럼.(웃음) 루시드폴 메일을 보니까 문장도 아주 좋고, 똑똑하더라고. 자신이 가사를 쓰고 작곡을 하고, 노래를 부르는 사람인데 내 시를 읽고 영감을 받아서 가사를 썼대. 타향살이 외로운데 가끔 편지를 보내도 되겠냐기에 난 40년을 미국에서 살았는데 물론이라고 했지.
2년 동안 편지 끝에 두 분이 지난해 실제로 만났다. 글로 소통할 때랑은 다른 기분이었을 것 같은데.
잘 생겼대, 키도 크고. 보통 젊은이 같지 않게 겸손하고 괜찮더라고. 근데 나는 그 친구의 음악을 잘 모르겠더라고.(웃음)
루시드폴 노래 멜로디가 잔잔해서?(웃음)
나는 나이도 있고 하니까 음악 듣는 스타일이 다르겠지. 우리 아이한테 들려 줬더니 미국의 잭 존슨 같기도 하다면서 음악이 참 좋다는 거다. 가사는 한국어니까 잘 모르겠지만. 내가 공부를 많이 해야겠구나, 싶다.
마지막으로 50년이 되도록 꾸준히 시를 쓰는 원동력은 뭔가?
모국을 사랑하고, 모국어를 사랑하니까. 아마 죽을 때까지 시를 쓸 것 같다. 시를 쓰는 게 지금의 나에겐 구명대 같은 줄을 잡고 있는 거다. 만약 시를 놓치면 구명대를 놓치는 거니까 우주의 미아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2. [뮤지션 루시드폴 인터뷰]
사진 제공ㅣ안테나뮤직
요즘 어떻게 지내나?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EBS 라디오 <세계음악기행>(오후 3~)을 진행하고 있다. 또 KBS 음악 프로그램 <유희열의 스케치북>에서 고정 코너를 맡고 있고. 가끔 친구들 음악 작업도 돕고 있다.
라디오 진행자로 나섰는데 많이 익숙해 졌나?
지난해 8월 말부터 했으니까 진행한 지가 이제 9개월 정도 됐다. 익숙해 지고 있는 중이다.(웃음) 게스트가 오면 사람에 따라서 농담도 하고 그러지만, 음악 소개 프로그램이고 1시간 이니까 음악 얘기를 많이 한다.
2001년쯤, 선생님의 시집『이슬의 눈』(문학과지성사)을 한 팬이 선물로 줬다. 사실 내가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냥 덮어두고 있었다. 이듬해 스웨덴으로 유학을 갔는데 그때 집에 있던 몇 권 안 되는 시집을 들고 갔다. 근데
30년도 넘는 두 분의 나이차도 있고, 만난 적도 없는 사이라 메일로 할 말이 많지 않았을 것 같은데.
글쎄, 반대일 수도 있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는 얘기가 편할 수도 있지만 펜팔처럼 서로를 적당히 모르고 글로 왔다 갔다 하는 관계가 편할 수도 있다. 나는 선생님 시를 다 알고 있고, 산문집도 봐서 어떤 인생을 사셨는지 짐작할 수 있었고. 아마 이메일을 주고 받았던 건 선생님이 전혀 모르셨던 날 알아 가는 과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처음 뵙고, 식사하고 술 한잔 하면서 얘기를 했는데 굉장히 편했다. 지금도 그렇다. 선생님이 어렵다거나 모셔야 한다거나 그런 생각이 안 드시는 분이다. 모습도, 생각도 굉장히 젊으신 분이다.
일단은 음악을 더 잘 해야지
사진 제공ㅣ비채
시인의 어떤 면이 특히 좋은 건가? 루시드폴 4집 < Les Miserables>에 수록된 곡 ‘고등어’의 가사도
시를 정말 잘 쓰신다고 생각한다. 선생님 시를 좋아하게 되면서 다른 시인의 시집도 추천 받아서 많이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근데 성에 안 찬다고 할까? 마음을 울리는 감동 같은 게 오지 않더라. 무슨 말을 하는 지 잘 모르겠고, 조금 상투적이란 느낌도 들고. 선생님의 시는 읽으면 오롯이 다 받아들여지는 느낌이다. 자신을 애써 드러내려고 하지 않아도 말하고 싶은 바가 뚜렷이 드러나고,단어 하나하나에 울림이, 긴장감이 있고. 그러니까 나처럼 시를 모르는 사람도 읽고 위안을 얻는 거겠지.
마종기 시인은 루시드폴의 음악에 대해 잘 모르겠어서 공부하겠다고 하시던데.
그러신가 보다.(웃음) 아무래도 나 같은 30대가 만드는 대중음악을 이해하시긴 쉽지 않으실 것 같다. 그래도 내 공연에도 2번이나 오셨고, 굉장히 이해하려고 노력하신 것 같다.
마종기 시인의 시 중에 가장 좋아하는 건?
많아서 정말로 고르기가 쉽지 않다. 시집『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문학과지성사) 중에서 ‘손녀를 안고’,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중에서 ‘네팔에서 온 편지’도 좋아하고. 뭐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등, 정말 많다.
공학도로서의 삶을 정리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온전히 음악에만 힘을 쏟은 지 1년이 지났다. 어떤가, 결정에 만족하나?
그럼. 잘, 행복하게 살고 있다. 결정이 맞았던 것 같다. 맞을 거라고 생각했고.
먼 훗날 꿈이 시인이라고 하던데?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고 지금도 안 하는 건 아닌데, 일단은 음악을 좀 더 잘 하고 나서.(웃음) 근데 시간이 많지가 않네. 음악도 더 많이 들어야 하고. 요즘 시를 쓰고 있진 않다. 습작으로 써 본 것 외엔. 브라질 대중음악의 아이콘 쉬쿠 부아르키(뮤지션이자 소설가, 극작가이기도 한)라고 있다. 1944년생인데 아직도 활동 중인 다재다능한 사람이다. 그처럼 활동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궁극적으로 음악적으로, 오래오래 하고 싶으니까.
ㅣ 글, 사진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