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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3 한국일보
[한국초대석] 마종기 시인
한일 국교 정상화 반대 자의 반 타의 반 조국 떠나 시인과 의사 생활
등단 50주년 맞아 12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과 에세이 출간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좋은 시는 찰나의 영감으로, 좋은 소설은 작가의 경험과 시야가 무르익을 때 써진다는 말이 있다.
랭보가 시집을 낸 게 19세, 김소월이 '진달래꽃'을 쓴 게 20세이니 전혀 틀린 말은 아닐 테다. 그러나 랭보와 김소월은 시대에 한 명뿐이니 이를 일반화할 수는 없지 않을까.
시인의 영감이 빛나는 순간 역시 시대 상황과 그의 감각과 이제까지의 경험이 맞물려 일어난 결과일 테니까. (마감을 앞둔 시인들이 이제나 저제나 '영감님(靈感)'을 기다리지만, 정작 이 영감님을 영접했다는 시인을 본 적은 없다.)
누구에게나 시간을 견디는 과정은 필요한 법이다. 마종기 시인의 시를 읽으면 연륜이 빚어내는 시란 이런 것임을 알게 된다. 이는 저 먼 타국에서 시인과 의사로 살아온 그의 이력을 들춰볼 때 더 절실히 다가온다.
글을 업으로 삼는 사람 중에 말과 글이 다르고, 글과 삶이 다른 이가 태반이지만, 그의 글은 그의 삶만큼이나 겸손하고, 또한 단정하다.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
5월 18일 저녁 대학로 한 소극장에서 그의 등단 50년을 축하하는 자리가 마련됐다. 미국에 오래 머문 터라 제자가 없는 그를 위해 후배 시인들이 마련해준 잔치에는 김병익, 김치수, 김주연 씨를 비롯한 문학과지성사 1세대와 그의 시만큼이나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황동규, 정현종 시인, 문정희, 김혜순, 황인숙 등 후배 시인들이 모였다. 축사와 가수 루시드 폴의 공연, 후배시인들의 낭송이 있었고, 마종기 시인은 이병률 시인과 무대에서 짧은 대화를 나눈 후 감사의 말을 전했다.
"제가 50년 전 문청으로 자라면서 알던 문단은 계파 간에 시기와 적대적 분위기가 만연했습니다. 그 사이 젊은 문인들은 어느 선배 시인 밑에 줄을 서야 작품을 팔 수 있는지 눈치를 보았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문단은 더 이상 부정적 경쟁이 아니라 품위와 겸손과 우정의 시대로 가고 있다고 봅니다. 바로 이 자리가 그걸 보여준다고 봅니다. 저는 한 명의 제자도 없습니다. 한심하게도 시인이란 놈이 20대 후반 고국을 떠나 외국생활로 평생을 지내고 있습니다. 제게 처음 있는 이 모임은 등단 50년 중 최고의 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몇 줄의 인사에 그의 생애가 담겨 있다. 지식인 가정에서 태어나 최고의 엘리트 교육을 받고, 미국의 중산층으로 안락한 생활을 했던 그가 불 꺼진 밤, 홀로 유랑의 노래를 부른 이유가.
1965년 군의관으로 재직하던 도중, 한일국교 정상화에 반대한 서명을 한 이유로 고문을 받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떠나게 된 조국. 아버지는 그 충격으로 석 달 뒤 세상을 떠났고, 단돈 50달러를 쥐고 미국에 간 그는 부친의 유고 소식에도 돌아올 수 없었다. 영구귀국은 준비할 때마다 무산됐다. 때문에 그의 시에서 조국은 영원히 갈 수 없는 노스탤지어 같은 것이다.
'내 집도 자동차도 없는 나라가 좋아?/ 아빠 나라니까./ 나라야 많은데 나라가 뭐가 중요해?/ 할아버지가 계시니까./ 돌아가셨잖아?/ 계시니까./ 그것뿐이야?/ 친구도 있으니까./ 지금도 아빠를 기억하는 친구 있을까?/ 없어도 친구가 있으니까./ 기억도 못 해주는 친구는 뭐 해?/ 내가 사랑하니까./ 사랑은 아무데서나 자랄 수 있잖아?/ 아무데서나 사는 건 아닌 것 같애./ 아빠는 그럼 사랑을 기억하려고 시를 쓴 거야?/ 어두워서 불을 켜려고 썼지./ 시가 불이야?/ 나한테는 등불이었으니까.' (시 '3. 대화',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중에서)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3일 후 광화문 한 카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얼마 전 낸 열두 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과 시작(詩作)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를 손에 쥐고서. 가끔 독자들로부터 문인 인터뷰 기사에서 인용문이 너무 길다는 평을 받는데, 변명을 하자면 이는 책에서 '한 줄도 뺄 만한 구석'을 못 찾았기 때문에 원문을 그대로 싣다 보니 길어진 것이다.
두 권의 책을 읽고 또 그런 고민을 하면서 그를 기다렸다. 이는 한 사람만의 고민은 아닐 터, 후배이자 '마종기 시인을 사랑하는 지하조직' 회원, 이희중 시인은 에세이집 한 켠에 "시집 모든 책장의 귀퉁이를 접어두어야 했다"고 썼다.
에세이의 서문에서 마종기 시인은 이렇게 말한다. '아무리 볼품 없는 시일지라도 외국에서 평생의 대부분을 살고, 외국어를 일상으로 쓰면서 모국어로 수백 편의 시를 써왔다면, 그 인간의 가슴 어느 곳에 몇 개의 상처가 없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이 한 줄은 또한 그의 시를 관통하는 말이다. 우선 그는 독자가 알아들을 수 있는 쉬운 언어로 그리움을 말한다.
가깝게는 가족부터 멀게는 조국까지. 이 그리움은 동생을 잃은 충격과 설움을 노래한 시집 <이슬의 눈>(1997)에서 절정을 이룬다. 그러나 시인은 이 슬픔을 피하지 않고 다시 세상 많은 것을 보듬는다. 절망을 넘어선 초연한 분위기가 시를 감싼다. 좋은 시는 그럴듯한 수사와 문학이론으로 쓰이는 것이 아님을, 그의 시는 보여준다.
누구나 대화를 하다가 분명 쉬운 말인데도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다. 기자들도 마감을 앞두고 기사를 쓰다 어휘가 턱턱 막힐 때가 있는데, 이때 전문가들의 분석 글이나 비평을 읽고 인용하며 기사를 쓴다. 우리말로 밥 먹듯 글을 쓰는 사람도 이 모양인데, 외국에서 시 쓰는 사람의 답답함은 오죽했을까.
"그럼요. 숨이 막히는 것 같은데. 단어, 표현도 그렇지만 문학 양식도 제가 외국에만 오래 살았기 때문에 부족한 게 많거든요. 문제는 부족한 걸 알면 좋은데, 제 작품이 부족한지 부족하지 않은지 확신이 안 설 때가 있어요. 그런 점들이 저한테는 약점이고 단점이에요. 한 1년 있다가 서울에 와서 '그 시 괜찮더라', 하면 안도의 한숨을 쉬죠."
''과메기가 뭐지요?'/ '이 근처 바다에서 많이 잡히는 물고기,/말려서 구워 먹으면 술안주에 좋지요.'/갑자기 내가 고국을 떠나 산/ 길고 긴 세월이 비까지 가린다.// 오래 전 중생대의 백악기 지층이라면/ 감포는 경상 누층군 어디쯤인데,/ 화석이 되어 돌 속을 헤엄치는 그 옛날/ 과메기라고 부르던 물고기가 있었던가.' (시 '과메기', <하늘의 맨살> 중에서)
몇 해 전 여행에서 과메기란 말을 처음 듣고 쓴 이 시는 열두 번째 시집에 있다. 그는 "몇 년 전 가수 조영남 씨와 술자리에서 '주꾸미'란 말을 처음 들었다. '이런 사람이 시를 써도 되나?' 싶어진다"고 했다.
"그런 건 지엽적인 게 아닐까요?"
"나도 그렇게 생각했으니 시를 썼겠지요."
마종기 시인과 인터뷰를 한다고 하니, 시인의 시를 좋아하는 한 후배가 말했다.
"예전 참여시가 주류일 때, 서정시 쓰셔서 비판 많이 들으신 걸로 아는데, 선생님 생각이 궁금하네."
이는 마종기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지하조직'으로 남아야 했던 이유이기도 한데, 그 후배가 새 시집을 읽는다면 그때 시인의 마음을 알 수 있을 터다. 이번 시집에 실린 몇 편의 시가 그에 대한 대답을 하고 있으니까.
'내가 비밀 한 가지를 알려줄게./ 우리는 단일민족이 아니야./(…)/ 맞아, 우리 조상은 대식국인에게도 반했고/ 몽고인에게는 백 년간이나 강간당했고/ 중국인의 씨받이, 일본인의 첩살이도 했어./ 그 자식들이 바로 너와 나지. 한 핏줄이라니!/(…)/ 민족을 파는 외판원은 더 이상 만나지 마./ 부끄러운 편이 거짓말의 역사보다는 나은 거야.' (시 '이별', <하늘의 맨살> 중에서)
"삶과 사상이 가장 자유로워야 하는 글쟁이는 한 마디로 자유를 찾으러 떠도는 사람인데, 자꾸 민족에 집착을 하는 걸 떠나야 하지 않을까…. 우선 저 자신부터 '내가 고국에 있지 않다는 이유로 고통을 받는 것으로부터 떠나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걱정하면서 이번 시집을 냈어요. 40년 동안 조국을 떠났으면서 왜 민족 걱정하는 사람을 뭐라고 하느냐고 욕을 먹겠구나, 생각하면서."
"이희중 시인은 마종기 선생님 바로 그 점이 좋았다고 말씀하셨는데요."
"헌사에서 그렇게 썼죠. 근데 마종기를 사랑하는 지하조직, 이들이 지상에 드러나지 않고 지하조직으로 갈 수밖에 없었던 건 제 생각이 그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맞지 않았던 거죠."
마지막 열 두 번 째 시집
새 시집의 앞면을 펼친다.
'생각해 보면 이런 몰골로나마 계속 시를 써올 수 있었던 것도 복이 아닐까 싶다. 그간도 내 시를 지켜보아주고 읽어준 당신께 감사한다.'
'그간도 내 시를 지켜보아주고…' 시인의 말이 꼭 떠나는 이의 인사말 같다.
"사실 이 시집을 끝으로 그만 쓴다는 말을 '시인의 말' 앞에 썼어요. 편집부에서 '정 시집을 내기 싫으면 앞으로 안 내시면 되고, 그걸 밝히실 필요는 없는 것 아닌가요?'하고 물어서 그 말도 맞는 것 같아서 지웠어요."
"왜 갑자기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이제까지 쓴 시들을 읽다 보니까… 내가 시를 못 쓰더라고. 또 억지로 쓴 것 같은 시도 눈에 보이고. 시를 쓴다는 것 자체, 그 자연발생적인 욕구는 오랫동안 썼으니 안 할 수 없겠지만, 그걸 모아서 책을 내는 건 안 하고 싶다 생각이 들어요."
"갑자기 슬퍼지는데요."
"나이가 칠십이 넘었으니까 나 자신은 정신이 온전하다고 생각이 들지만, 남들은 나를 보고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르는데 그런 정신으로 시를 쓴다는 게 위험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조금 들고. 제일 큰 이유는 시집 낸다고 보니까 내가 이정도밖에 안 되나, 절창이 있어야 하는데 하는 마음이 있지요."
'나는 내 시가 한국문학사에 남기보다는 내 시를 읽어준 한 사람 한 사람의 가슴 속에 남기를 바란다' (에세이 <당신을 부르며 살았다> 작가의 말 중에서)
여기, 당신을 부르는 노래가 있다. 노랫말은 소박하지만, 당신에게 닿을 수 없는 간절함이 듣는 이의 가슴의 한 켠을 아리게 하는 노래. 소박한 그 말 덕분에 자꾸 자꾸 다시 듣게 되는 노래. 시련과 슬픔을 누르고 희망과 사랑을 말하는 노래는 따뜻하고 겸손하다. 그의 시가 세대를 뛰어 넘어 읊어지는 이유다.
마종기 시인은…
1939년 일본 도쿄 출생. 아버지는 아동문학가 마해송 씨, 어머니는 우리나라 최초 서양무용가 박외선 씨.
연세대 의대, 서울대 의학대학원 졸업.
1966년 도미,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과 톨레도 아동병원에서 근무.
1959년 <현대문학>추천으로 등단.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현대문학상 등 수상.
시집 <조용한 개선>(1960), <두번째 겨울>(1965), <변경의 꽃>(1979),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1986), <그 나라 하늘빛>(1991), <이슬의 눈>(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2002),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2006), <하늘의 맨살>(2010) 등 펴냄.
2010-05-09 한국일보
마종기 열두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매년 봄이면 한국에 돌아와 3개월 가량 체류하는 마종기 시인은 "한국에서 먹고 자고 숨쉬고, 친구들과 문학 얘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기쁘고 만족스럽다"고 말했다. 류효진기자 jsknight@hk.co.kr
재미 시인 마종기(71)씨가 열두 번째 시집 <하늘의 맨살>(문학과지성사 발행)을 펴냈다.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2006) 출간 이후 4년 만이다.
27세 때인 1966년 미국으로 건너가 의사로 일하면서 꾸준히 시작 활동을 해온 그는 2002년 의사에서 은퇴한 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생활하고 있다. "이국의 병원에서 보내는 힘들고 숨막히는 생활 속에 시 쓰기는 철학적 수사가 아닌 생존의 차원에서의 구원이었다"고 회고하는 그의 시는 의사 체험에서 비롯된 삶에 대한 통찰, 조국에 대한 그리움 등을 따뜻한 서정과 순연한 모국어로 표현하며 많은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평생 마음에 품고 시로 육화해왔던 짙은 향수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예컨대 시 '북해의 억새'에서 그는 유럽 북해에서 황홀하게 바라봤던 은빛 억새꽃이 전남 순천의 그것과 너무도 닮았음을, 심지어 억새를 흔드는 바람소리마저 서로 닮았음을 깨닫고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내려놓는다. '나는 이제 아무 데나 엎드려 잠들 수 있다./ 하루 종일 자유롭게 길 떠나는 씨를 안은 꽃,/ 꽃이라 부르기엔 눈치 보이던, 북해의/ 외딴 억새도 고향의 화사한 피의 형제라니!/ 저녁이면 음정이 같은 메아리가 된다니!'
마씨는 "예전엔 고국을 떠난 삶의 고단함,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워해야만 하는 상처를 시로 노래했는데, 이번 시집을 묶으면서 비록 몸은 이국에 있지만 내 정신이 고국에서 살고 있으니 나는 이미 귀환한 것이라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음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지난 시집에 이어 이번 시집에서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여행시에서도 이같은 시인의 회심(回心)을 엿볼 수 있다. '우리가 살아온 길과 물을 모두 모으면/ 사무치게 오래된 흐린 항구가 되느니/ 가난한 마을 작은 집의 나이 든 아내를 보면/ 그 긴 여행을 어찌 젖은 과거라고만 부르리.'('노르웨이 폭포'에서)
그래도 고국 땅만큼 시인의 감각을 들깨우는 곳이 또 있으랴. 난생 처음 가본 연신내 시장통에서 비 내리는 밤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삶에 대한 회한을 토로하는 시 '연신내 유혹'은 이번 시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절창이다. '평생 얼굴 들기가 힘이 들었어./ 피 토하며 시를 쓰지 못해 미안해./ 고집도 줏대도 없이 글을 쓴다며/ 눈치 보며 비켜 다니며 살았지.'
그러나 그 회한은 건강하여 노시인이 앞으로 부를 노래를 다시금 기대하게 만든다. '연신내에 와서야 드디어 시인이 되었다./…/ 쓰고 싶은 글, 허름한 목청만 좋아하는/ 구수한 맛들이 모여 살고 있는 곳,/ 평범한 것은 대개 친절하고 따뜻해,/ 무리수 없이 감칠맛 나는 정성일 뿐이야.'
2008-04-01 미주한국일보
<박승범 기자> sbpark@koreatimes.com
“살기 위해 글을 쓰게 됐습니다”
“문학과 거리를 두겠다 생각했는데 잘 안됐죠.”
연세대 의대와 서울대 대학원을 마치고 1966년 도미한 마종기 시인은 “미국에 온 이후 글을 쓴다는 것 자체가 미국생활에서 많은 위로가 됐다”고 말했다.
1959년 ‘현대문학’ 추천으로 등단한 그는 ‘조용한 개선(1960)’, ‘두번째 겨울(1965)’, ‘변경의 꽃(1976)’, ‘이슬의 눈(1997)’ 등의 시집과 ‘별, 아직 끝나지 않은 기쁨(2003)’의 산문집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한국문학작가상, 편운문학상, 이산문학상, 동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마종기 시인은 이번 방문을 통해 UC버클리 한국학센터에서 오늘 오후4시 1년반전 한국문학번역원 지원을 받아 출간한 영시집 ‘Eyes of Dew(이슬의 눈)’ 낭독회를 갖는다.
그는 “의사로서 시를 쓰게 됐는데 미국에 와 살아오면서 한국에 시를 발표하게 돼고 독자들의 반응이 괜찮아 두가지 길로 살아왔다”며 “미국에서 (내 시를) 번역해서 잡지에 내 왔는데 (미국인들이) 이해를 못해 벽에 부딪혀왔다”고 번역상의 언어장벽이 작지 않음을 설명했다. 그는 이어 “한국문학을 영어권에 알리는데 일조를 해야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한국 영시번역에 있어 최고라고 평가되는 귀화한 영국인 앤서니 틱스 서강대 영문학과 교수의 도움으로 영시로 재탄생한 ‘Eyes of Dew(이슬의 눈)’은 앞서 번역돼온 어떤 한국 시인들의 시집보다 많은 판매부수를 올려 출판사측에서 다른 시집을 내자고 제안해온 상황이다. 앤서니 틱스 교수는 영국 옥스포드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프랑스에서 수사가 됐고 이후 한국으로 건너와 선교활동을 하다 귀화해 서강대 영문학과 과장도 역임한 바 있다.
마종기 시인은 “그 분(앤서니 틱스 교수)과 100편 정도 번역했는데 대부분 잘못된 방향으로 번역돼 놀랐다”면서 “20번 이상 만나 많이 토의하면서 번역작업을 했다”고 말했다.
한편 마종기 시인은 연세대 의대에서 ‘문학과 의학’을 주제로 6년째 강의를 맡아오고 있다.
2007-01-26 미주한국일보
<정숙희 기자>
미주한인 문단의 대표적 시인 마종기(67)씨가 영문시집 ‘이슬의 눈’(Eyes of Dew)을 출간했다.
미국에서 40년을 살면서 우리말 시집을 열한권이나 낸 후에 처음으로 펴낸 영문시집이다. 자신이 영어로 쓴 것이 아니고, 영국 태생 가톨릭 수사인 안선재 교수(Brother Anthony, 서강대학교 영문과 교수)가 한국문학 번역원의 재정 지원을 받아 번역하고 출판된 것이다.
시집을 열한권이나 냈어도 홍보는 신경도 쓰지 않던 시인이 첫 영문시집에 관하여는 이례적인 ‘부탁’을 해왔다. 그가 책 속에 끼어 보낸 편지 내용을 소개한다.
“…쑥스러운 부탁 말씀을 한 가지 드리고 싶습니다.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으시다면 이 책을 한두 권 사주실 수 있겠는지요? 그간 한국인의 영시집이 여러 권 미국에서 출간되었지만 100권이 팔린 시집이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내 시집을 출간한 출판사와 더불어 미국의 몇 문학전문 출판사에서는 한국 번역원의 출판비 지원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며 그나마 몇 안 되는 한국 현대시집 출간 계획을 포기하려고 한답니다.
이런 시점에서 미국에서 40년을 살아온 내가 이 나라에서 시집을 팔 수 없다면 고국의 딴 시인에게서야 무슨 기대를 할 수 있겠습니까, 내 시집이 미국의 여러 곳에서 좀 팔려야 이 나라의 문학 출판사들이 한국계 시인의 시집 출간을 희망적으로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해서 이렇게 부탁을 드리는 것입니다.
평생 처음 내가 자신의 시집을 사주십사고 애걸하는 모습이 되었습니다만 부끄럽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혹 이 책이 좀 팔려 내가 미국 시단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보다, 한국의 문학과 현대시가 미국인에게 알려지고, 그래서 한국 문학이 세계의 문학으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희망이 내게 더 절실하기 때문입니다…”
시인의 말대로 시집을 사달라는 부탁이 하나도 ‘부끄럽게’ 여겨지지 않는다. 커녕, 그렇게 말할 수 있음이 존경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은 노시인의 ‘애걸’이 목적하는 바가 너무 감사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영문 ‘이슬의 눈’에는 마시인의 9개 시집에 발표된 시 90편이 수록됐다. 조용한 개선(Quiet Triumph, 1960), 평균율(Well-Tempered Clavier, 1968), 카리브 해에 있는 한국(Korea in the Caribbean Sea, 1972), 변경의 꽃(Frontier Flowers, 1976), 안 보이는 사랑의 나라(Invisible Land of Love, 1980), 모여서 사는 것이 어디 갈대들뿐이랴(How Should Living Together Be Only for Reeds, 1986), 그 나라 하늘 빛(The Color of That Country’s Sky, 1991), 이슬의 눈(Eyes of Dew, 1997), 새들의 꿈에서는 나무 냄새가 난다(In the Bird’s Dreams Trees are Fragrant, 2002) 등이 9개 시집.
마종기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서울고등학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서울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1966년 도미했다. 아버지는 아동문학가인 마해송이며, 어머니는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무용가인 박외선이다.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 방사선과 조교수 겸 방사선 동위원소 실장, 소아과 임상 정교수 등을 역임하였고, 오하이오 아동병원 초대 부원장 겸 방사선과 과장으로 일하였다.
1959년 시 ‘해부학교실’로 현대문학 추천을 받아 등단했고 1976년 한국 문학작가상을, 1989년 미주문학상, 2003년 제16회 동서문학상을 수상했다. 바로 최근에 열한 번째 시집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문학과 지성)를 펴냈다. 의사로서의 특별한 체험들과 이민생활의 외로움을 기본 모티프로 작업하는 마시인의 시에서는 삶과 죽음, 사랑과 상처, 고향과 외로움이 때론 격렬하게, 때론 서정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시집 ‘이슬의 눈’은 정가 16달러인데 Amazon.com 등의 인터넷 샵에서 구입하면 훨씬 저렴하게 살 수도 있다고 시인은 귀띔했다. 시인의 영어 이름은 Chonggi Mah이고 ‘Eyes of Dew’를 검색하면 찾을 수 있다고 한다.
시인의 이메일 주소는 cjmah5@hotmail.com 혹은 cjmah7@hanmail.net 이다.
After we have all departed this life,
should my soul brush past your face
do not for one moment think
it’s just the wind that shakes the springtime branches.
I intend to plant a flowering tree today
in a scrap of shade on that spot
where I encountered you,
then once that tree has grown and blossoms,
all the torments that we have known
will turn into petals and drift away.
Turning into petals, they drift away.
It may be too remote and pointless a task
but, after all, aren’t all the things we do down here
measured with so brief a yardstick?
As you sometimes pay heed to the blowing wind,
my gentle dear, never forget, no matter how weary,
the words of the wind from far, far away.
<바람의 말>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 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건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2006-11-24 미주한국일보
육길원
'이슬의 눈물'의 주인공
의사 시인 마종기
“그의 글에 담긴 언어들은 고요히 내리는 봄비를 닮고, 잔잔히 흐르는 강물을 닮았다. 이 분의 책을 읽고 나면 ‘우화의 강’에서처럼 물길을 항상 맑게 고집하는 사람으로 살고 싶은 갈망에 문득 가을 하늘 같은 기도를 바치고 싶어진다.” 이해인 수녀 시인은 마종기 의사 시인을 그렇게 이야기한다.
마종기 시인과 시카고에서 몇 일 시간을 함께 가졌다. 점심도 같이 먹고,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서 시 낭송의 시간도 함께 가졌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자랐고 미국 오하이오 톨리도 에서 의사로 대학교수로 일하면서, 여동생과 어머니가 살고 있는 시카고에 자주 들리곤 했다. 지금은 은퇴한 후 플로리다에 머물면서 많은 시간을 한국에서 보내고 있다. 서울에 가면 그가 좋아하는 황동규를 비롯한 문학친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기도 하고 창작에 전념하기도 하지만, 그의 모교인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문학강의도 맡고 있다. 그는 공군 군의관 시절에도 생리학을 가르쳤고, 오하이오 주립대학에서도 방사선학과 교수로 봉직했지만, 무엇보다도 문학을 통해 얻은 것을 후배들에게 전하는 일을 큰 보람으로 여기고, 자신도 이것을 무척 즐긴다고 했다. 훗날 학생들은 생리학보다 생땍쥐베리를 더 기억한다고 한다.
플로리다 올랜드 근처에 은퇴처를 정했으나, 너무 더워서 추운 겨울 4개월쯤만 그곳서 지내고, 한국과 미국의 이곳 저곳에서 초청을 받아 문학강연을 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면서 지낸다. 시카고에도 그래서 왔다.
의사이면서 시인으로서 꾸준히 창작 활동을 하고 있는 마 시인은 이번에 ‘우리는 서로 부르고 있는 것일까?’라는 제목의 시집과 ‘Eyes of Dew'(이슬의 눈물)이라는 영문 시집 등 2권을 출간했다. 미국사회와 우리 2세들에게 한국시의 진수를 소개 할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한다. 우리들도 많이 사봐야 할 것 같다. 반스 앤 노블이나 보더스 같은 큰 서점에서 살 수 있으며, AMAZON.COM 인터넷서도 구입 할 수 있다.
마종기 시인은 아들만 셋을 두었다. 이들은 평소 아버지가 시인인 것을 실감하지 못했다고 하는데, 이번에 영역 출판된 시집을 계기로 시인 아버지에 대한 긍지가 더 커졌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슬의 눈’은 장사를 하다 94년 흑인 흉탄에 맞아 비명에 간 동생 마종훈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이 시집의 중심이다. 그래서 ‘이슬의 눈’이 저자에게는 ‘눈의 이슬’로도 읽힌다며, 천주교 신자인 저자가 다시 만나기를 기대하는 동생에게 이 시들을 준다고 했다.
동화작가로 한국문단의 거목이었던 마해송씨의 삼남매 중 장남인 마 시인은 2살 터울로 한국에서 한국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던 동생 마종훈과 신앙과도 같은 우애를 간직하고 있다.
어릴 때는 고등학교까지 같은 이불을 덮고/ 대학에 가서는 작은 아랫방을 나누어 쓰고/ 장가든 다음에는 외국에까지 나를 따라와/ 여기 같은 동네 바로 뒷길에 살던/ 내 동생 졸지에 억울하게 죽었습니다, 하느님./ 동생이고 친구고 내 의지처였습니다/ 싸움 한번도, 목소리 한번도 높이지 않은/ 들풀처럼 싱글거리며 착하게 살던 내 단짝,/ 하느님, 당신밖에 하소연할 곳이 없습니다./ 눈물이 자꾸 납니다. 관을 덮고 나면 내일 하늘이 열리고/ 내일 지나면 이 땅에서 지워질 이름,/ 당신을 원망하지 않겠다고 약속합니다/ 귀염둥이 내 자식이라고 받아주세요.
동생을 위한 조시(弔詩)-외국에서 변을 당한 훈에게 중에서, 제1편 ‘입관식’이라는 제목의 시이다.
이와 같이 지극한 우애와 착한 심성은 어디서 왔을까? 부모한테서 받은 것이다. 아들은 ‘내 아버지’ 라는 제목으로 다음과 같은 시를 썼다. 내 아버지는/ 아직 젊으시다./ 추운 밤 길목에 서서/ 늦은 누이동생/ 애인처럼 기다리신다./ 내 아버지는/ 머리가 훤한 반백색,/ 아직 아직도 젊으시다./ 오늘밤 눈이 오려나 흐린 날씨면/ 말없이 브람스에 귀기울이셔/ 저기 어머니를 불러 앉히시고/ “그렇지?” 처음 만난 부끄러움같이/ 서로 눈감고/ 브람스에 귀기울이셔/ 첫눈이 온다/ 어두운 초저녁에 첫눈이 온다/ 나는 친구랑 밤길을 걷고/ 남은 아버지/ 혼자서 술잔이나 기울이신대-/ 아버지 젊으실 땐, 아이 참./ 아직 젊으시지./
가장의 사랑, 부부애, 자식의 효도가 흠뻑 베어있는 복된 가정의 스토리다.
그뿐인가? 마해송 선생이 세상을 떠나자, 언론인 홍승면씨는 동아일보 횡설수설 난 칼럼에 ‘마해송’을 이렇게 기록했다.
“태양과 같은 사람은 아니었다. 달 같은 사람이었다고도 말할 수 없다. 그러나 맑고 시원한 별이었다. 칸나나 다알리아나 글라디올러스 같은 꽃이 아니라 모란이나 장미나 백합에 비기고 싶은 사람이었다. 매화에 비기는 게 더 어울릴지도 모를 사람이었다.” 문필가인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마종기 시인은, 평론가 김주연씨의 평처럼 “우리 현대시가 도달한 가장 높은 경지”에서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아름다운 시로 우리들에게 기쁨과 영감을 계속 주기를 바란다.